《GRIS》는 텍스트 한 줄 없이도 한 사람의 감정 붕괴와 회복을 오롯이 시각과 음악으로 전달하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Berlinist의 음악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GRIS가 어떻게 음악을 통해 슬픔의 단계를 하나씩 걸어가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마치 ‘같이 울고 같이 치유되는’ 감정의 여정을 체험하게 했는지를 분석한다.
1. 음악으로 슬픔을 그리는 방식 – GRIS의 구조
🎭 감정의 5단계
GRIS의 전체 구조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슬픔의 5단계 모델’을 따른다:
- 부정 (Denial)
- 분노 (Anger)
- 타협 (Bargaining)
- 우울 (Depression)
- 수용 (Acceptance)
각 단계는 고유의 색과 함께 음악의 톤, 템포, 악기 구성, 멜로디 방향도 달라진다.
이 곡들은 단지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다. 감정의 구조 그 자체를 음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2. 단계별 음악 해설과 감정 설계
🎼 1단계 – 부정 (Color: Grey)
대표곡: “Gris, Pt. 1”
- 악기: 단음 피아노, 얇은 스트링
- 구성: 느린 3박자, 멜로디 없음, 공백 많음
- 분위기: “나는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고 있다”
플레이어는 무너진 조각 위를 걷고, 점프조차 불가능한 상태다. 음악은 이 침묵과 붕괴를 음으로 표현한다.
🔥 2단계 – 분노 (Color: Red)
대표곡: “Gris, Pt. 2” / “Wind”
- 악기: 중저음 스트링, 금관 악기, 노이즈 드럼
- 리듬: 불규칙적, 격렬한 강세와 반복
- 분위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 구간에서는 폭풍과 맞서 싸우는 연출이 등장하고, 음악은 감정의 분출을 그대로 음에 담아낸다.
💧 3단계 – 타협 (Color: Green/Blue)
대표곡: “Path” / “Platforming”
- 악기: 하프, 클라리넷, 베이스 피아노
- 구성: 상승과 하강 반복, 불완전한 화음 진행
- 분위기: “나는 뭔가 다시 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
이 곡은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이전보다 리듬감이 생기고, 멜로디가 만들어진다. 이건 감정의 타협과 희망의 싹을 상징한다.
🖤 4단계 – 우울 (Color: Black)
대표곡: “Descending” / “Gris, Pt. 3”
- 악기: 저음 피아노, 잔향이 긴 리버브
- 리듬: 느림 (♩= 50 이하), 긴 쉼표
- 분위기: “나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GRIS의 가장 어두운 구간. 캐릭터의 움직임도 느려지고, 화면도 거의 흑백에 가깝다. 음악은 거의 숨결처럼 느껴지는 사운드만을 남긴다.
🤍 5단계 – 수용 (Color: White + All Colors)
대표곡: “Symphony” / “Gris, Pt. Finale”
- 악기: 전 악기 총출동 (피아노, 스트링, 코러스)
- 화성: 장조로 전환, 상승 모티프 반복
- 리듬: 차분하지만 전진하는 템포
- 분위기: “나는 이 모든 감정을 껴안기로 했다.”
이 마지막 구간에서 음악은 슬픔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전환된다. 모든 색이 돌아오고, 플레이어는 자유로운 이동과 새로운 시야를 얻는다.
음악은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제 그걸 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감정을 전달한다.
3. 감각 통합 – 음악과 색, 애니메이션의 완벽한 교차
🌈 음악 = 색
Berlinist는 음악을 작곡할 때 각 구간의 색채와 미술팀과 긴밀히 협업했다.
그 결과 각 감정 단계에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색의 흐름, 구조물의 움직임, 캐릭터의 모션까지 이끌어내는 리드가 된다.
🎞 음악 = 애니메이션
GRIS는 종이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수작업 풍의 연출을 사용하며, 음악은 장면의 컷, 전환, 타이밍에 맞춰 정확히 배치된다.
대표 예시:
- 폭풍이 몰아칠 때 → 드럼 + 브라스가 상승
- 낙하 장면 → 저음 현악과 피아노 추락음 조합
- 색이 터지는 장면 → 풀오케스트라 + 코러스 클라이맥스
4. 작곡가 인터뷰 & 제작 의도
“우리는 음악이 스토리텔링을 주도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플레이어가 감정을 먼저 느끼고, 그 감정에 맞는 의미를 ‘스스로’ 찾도록 음악을 디자인했죠.” – Berlinist
GRIS의 음악은 ‘플레이어가 슬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의 질감과 파동을 던지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플레이어 스스로의 몫이 된다.
이 점이 GRIS를 단순히 슬픈 게임이 아닌, 감정의 예술로 만든 이유다.
📚 결론 – 말하지 않아도 마음에 닿는 음악
GRIS의 음악은 슬픔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슬픔이 어떤 색인지, 그 색이 어떤 파동을 갖는지 느끼게 해준다.
플레이어는 그저 음악을 따라가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다.
우리는 왜 울었을까? 아마도 그건 음악이 먼저 울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다음 편 예고:
6부 – Hades: In the Blood – 전투 속에서 흐르는 사랑의 음악
전투의 반복과 가족의 고통 속에서도 ‘In the Blood’는 어떤 감정을 심었는가?
다음 편에서는 격렬한 게임에 스며든 감정의 선율을 해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