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은 형사 RPG의 탈을 쓴 가장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기억을 잃은 탐정이 되어 도시 ‘레바숄’을 탐험하고, 살인 사건을 조사하며, 동시에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구성해나갑니다.
이 게임은 '퀘스트를 수행해 경험치를 쌓는 RPG'가 아니라, 정신의 조각들을 모아 자아를 재건하는 철학적 체험입니다.
1. “당신은 누구입니까?” – 게임이 던지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
디스코 엘리시움은 기억상실 상태로 눈을 뜬 주인공 ‘해리 듀보아’로 시작됩니다. 이 형사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경찰이 맞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하죠.
- 그가 어디 출신인지,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전부 공백
- 플레이어는 대화와 선택을 통해 ‘자신’을 다시 정의해나가야 함
이 구조는 단순한 게임적 장치가 아닙니다. ‘자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택과 경험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철학적 선언입니다.
📘 장 폴 사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 후에 스스로를 정의한다
- 우리는 본질이 아니라 선택으로 구성되는 존재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명제를 게임 시스템 전체에 녹여냅니다.
2. 철학 키워드 ① 내면의 목소리 – 자아의 해체와 재건
이 게임의 독특한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의식 속 24가지 스킬들이 대화창에 등장해 스스로를 평가하고, 조언하며, 때로는 공격까지 한다는 점입니다.
- 예: ‘자기고양감(Empathy)’, ‘수사감각(Logic)’, ‘반사신경(Reaction Speed)’ 등
- 이들은 하나의 ‘능력치’가 아니라 캐릭터 내부의 성격과 사상, 감정
- 의식 속 독백이 진짜 게임의 대화
이는 인간 자아의 다면성을 상징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단일하지 않고, 내면에 서로 다른 자아들이 공존하며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는 개념이죠.
🧠 자크 라캉 – 언어를 통한 자아의 구성
- 인간의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언어와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자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대화와 선택의 결과로 형성되는 ‘흐름’임을 보여줍니다.
3. 철학 키워드 ② 이념과 신념 – 너는 무엇을 믿는가?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사소한 선택부터 시작해 정치적 입장, 세계관, 도덕 가치까지 선택하게 합니다.
- “당신은 자본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
- “군중의 자유를 믿는가, 질서 있는 권위를 지지하는가?”
- “현실을 바꾸고 싶은가, 받아들이고 싶은가?”
이 질문들은 전투와 무관하지만, 게임 내의 인물, 세계와의 관계, 스스로의 태도를 형성합니다.
🔗 안토니오 그람시 – 헤게모니와 자아
- 인간의 자아는 이념적 구도 속에서 사회가 제시하는 역할과 기대를 수용하며 만들어진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정치와 철학, 이념이 개인의 자아 형성에 얼마나 깊이 스며드는지 게임으로 실감하게 만듭니다.
4. 철학 키워드 ③ 도덕과 책임 – 실패한 자의 구원은 가능한가?
해리 듀보아는 ‘형사’이지만, 사실상 알코올 중독자, 낙오자, 사회적 잔해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 관계, 과거로부터 도망쳐 왔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에게 한 가지 기회를 줍니다:
“너는 다시 정의될 수 있다. 너는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
여기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패와 책임, 윤리적 선택에 대한 깊은 물음을 던집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덕성’
- 도덕이란 단번의 선택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해서 실천되고 형성되는 태도
해리의 선택은 단순히 엔딩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용서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패한 자’에게도 철학적으로 구원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드문 게임입니다.
5. 도시 레바숄 – 무너진 세계의 메타포
게임의 배경인 ‘레바숄’은 한때 혁명이 일어났던 도시지만, 지금은 혁명도, 질서도, 미래도 사라진 폐허입니다.
- 공산주의는 무너졌고, 자본주의는 망가졌으며, 남은 건 권태, 불신, 실패뿐
레바숄은 도시이면서 동시에 인간 내면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해리 듀보아의 망가진 정신처럼, 이 도시도 과거를 잃고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허무주의와 극복
- 전통적 가치가 붕괴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것인가?
레바숄과 해리는 모두 과거를 잃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자아, 새로운 길을 찾을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디스코 엘리시움이 지닌 실존적 아름다움입니다.
6. 결론 – 자아란 구성되고, 깨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
- 디스코 엘리시움은 자아, 정치, 윤리, 존재에 대한 복잡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텍스트입니다.
- 기억을 잃은 형사의 이야기는 곧,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실존의 과정입니다.
- 이 게임은 전투도 없고, 전형적인 레벨업도 없지만, 삶과 철학에 대한 가장 깊은 질문을 던지는 RPG입니다.
“나는 누구였고, 누구여야만 하는가?”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 질문을 당신 스스로 답하게 만듭니다.
📢 다음 편 예고:
게임 속 철학 9부 – 사이버펑크 2077: 기술 속 인간, 인간 속 기술 기계화된 육체, 불안정한 정신, 불멸의 데이터. 사이버펑크는 인간의 경계를 허물며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되묻는 철학적 세계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기술과 존재의 경계에 대해 깊이 탐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