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테일(Undertale)》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모두 살인과 선택, 그리고 죄책감과 구원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플레이어는 직접 생명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존재로 설정되고, 그 결과로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역시 "위대한 인간은 살인을 저지를 권리가 있다"는 논리 아래 죄를 저지르고,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갑니다.
이번 글에서는 두 작품이 어떻게 도덕적 자유, 인간의 내면, 죄의 논리, 용서와 회복을 다루는지 심도 있게 분석합니다.
1. 선택은 자유인가, 시험인가?
🎮 언더테일 – 플레이어의 선택이 세계를 만든다
언더테일은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집니다. 플레이어는 전투 시 적을 죽이지 않고도 게임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전투 후 "용서한다", "포옹한다", "말을 건다" 등 전투를 '이야기'로 해결하는 방식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를 모른 채, 혹은 편의에 따라 모든 적을 죽이는 ‘제노사이드 루트’로 갈 수도 있습니다.
- 누구도 죽이지 않는 ‘Pacifist’
- 필요할 때만 죽이는 ‘Neutral’
- 모두 죽이는 ‘Genocide’
이 루트들은 스토리뿐 아니라, 게임의 분위기, 음악, 대사, 존재하는 캐릭터 자체를 바꿉니다.
즉, 언더테일은 “선택은 자유”라고 하면서도,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무겁고 되돌릴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 『죄와 벌』 – ‘선택’의 책임은 논리로 지울 수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학생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던 중 이런 가설에 도달합니다:
"위대한 인간은 사회의 법과 도덕을 초월할 수 있다. 나폴레옹도 수많은 생명을 죽였지만, 영웅이 되었다."
그는 "하찮은 존재"인 노파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위대한 인간'임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살인 후, 그는 논리가 아닌 무의식과 감정의 영역에서 무너져갑니다. 그는 자유로운 선택을 했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내면의 양심을 파괴합니다.
이는 언더테일에서 플레이어가 제노사이드 루트를 선택한 뒤 캐릭터들이 냉담하게 변하거나, NPC가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모습과 비슷한 정서를 보여줍니다.
2. 죄의 인식 – 죄는 행위인가, 감정인가?
☠ 제노사이드 루트 – 공감 없는 살인
언더테일의 제노사이드 루트를 택하면, 플레이어는 마치 "경험을 위한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 적은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도망가고, 대화하려 하며, 변화를 원합니다
- 하지만 플레이어는 아무 이유 없이 죽입니다
이 루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의 감정이 점점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전투 중 대사가 없어지고, 눈이 붉게 변하며, 플레이어가 더 이상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죄의 반복이 인간성을 마비시킨다는 메타포입니다.
⚖ 라스콜리니코프 – 논리로 정당화된 죄
라스콜리니코프는 "나는 올바른 이유로 살인을 했기에 죄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현실의 도덕 대신, 자신의 철학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이상 징후를 겪습니다:
- 불면, 망상, 발작
- 죄책감을 타인에게 투사
- 사건 현장에 돌아가는 강박
이는 언더테일의 제노사이드 루트에서 플레이어가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한 명 남았다"는 공포스러운 메시지와 유사합니다. “모든 죄는 끝까지 마주해야 한다.”
3. 죄와 벌 – 처벌은 구원인가?
🔒 언더테일 – 진정한 벌은 외면당하는 것이다
제노사이드 루트의 마지막 보스인 산즈(Sans)는 플레이어에게 말합니다:
"너는 반복할 수 있었고, 멈출 수도 있었어. 그런데도 계속 죽였지. 넌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산즈는 법적으로 플레이어를 처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냉소와 체념, 무표정은 가장 깊은 감정적 단절입니다.
게임은 전투에 이긴 후에도 “당신은 이 세계에서 환영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이는 사회적 단절, 자기 혐오, 존재 부정이라는 형태의 '벌'입니다.
⛓ 『죄와 벌』 – 시베리아 유형, 그 너머의 고통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자백하고 시베리아 유형형을 선고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육체적 처벌이 아닌 정신적 붕괴와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는 자백했음에도 자신이 왜 벌을 받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 고통 속에서 소냐라는 존재를 통해 “죄는 법이 아니라 양심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죄의 대가는 외부가 아닌 자기 내부에서 오는 것이며, 그 무게는 법적 형벌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남습니다.
4. 구원은 가능한가?
💡 언더테일 – 리셋 불가능한 선택
제노사이드 루트를 완료한 후, 플레이어는 다른 루트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데이터를 삭제해도, 흔적은 남습니다.
이 설계는 플레이어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선택했으며, 그것은 기억되었다. 당신은 완전히 순수한 존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Pacifist 루트를 통해 플레이어는 다시 한 번 연결과 공감, 용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모순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죄를 지은 자도, 다시 사랑받을 수 있는가?”
❤️ 『죄와 벌』 – 사랑이 남긴 길
소냐는 창녀로 살아가면서도, 심장을 잃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말하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동행합니다. 그의 죄를 용서하기보다, 그와 함께 죄의 무게를 견뎌줍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장면을 통해 말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무너지지만, 사랑으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결론 – 우리는 누구를 죽였고, 무엇을 살릴 수 있을까?
《언더테일》과 『죄와 벌』은 모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탐색하는 작품입니다.
- 선택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
- 죄는 법보다 내면의 고통으로 드러난다
- 벌은 형벌이 아니라 존재의 상실이다
- 구원은 사랑과 공감 속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게임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는 계속해서살리고, 죽이는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가장 무거운 죄는 타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인간다움을 죽이는 것이다.
📢 다음 편 예고:
게임과 문학 시리즈 10부 – 페르소나 5 × 『파우스트』
욕망과 정의, 계약과 대가.
페르소나 5와 괴테의 『파우스트』는 “무엇을 얻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포기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마지막 회에서 탐욕과 영혼의 거래를 함께 분석합니다.